지난 9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미국을 방문중에 전한 메시지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실패로 끝났다”고 하여 큰 논란이 있었습니다. 교황의 말대로라면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완성도, 속죄함도 다 무익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관련된 내용들을 찾아보았는데 우리가 전해 들어 알고 있는 내용이 사실과 달랐습니다. 교황의 메시지는 교회와 성직자들이 가지고 있는 세속적 가치관에 대해 경고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 세상의 눈으로 본다면 예수님의 삶도 실패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실패라고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로마 캐톨릭이나 교황이 역사적으로 반기독교의 모습들을 적지 않게 보여 주었기 때문에 철저한 경계를 가지고 멀리해야 함은 분명합니다.
1517년 10월31일은 독일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교수였던 마틴 루터가 이러한 복음의 변질과 교회 기득권자들의 부패에 반기를 들고 종교개혁운동을 시작한 날입니다. 당시 교회는 성베드로 사원을 건축할 자금을 모으기 위해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면죄부를 산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죄가 용서받을 뿐만 아니라 연옥에서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는 보증서를 교황으로부터 받는 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 잘못된 일에 교회와 성직자들이 적극적으로 앞장서고 있었던 것에 루터는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교황이 마치 하나님인 것처럼 인간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을 자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분노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면죄부 문제와 성직자의 타락 그리고 성직자의 타락을 위한 도구가 되어버린 성경에 대해 95개 반박 조항문을 비텐베르크 나무 대문에 붙인 것입니다.
종교개혁이 가지는 진정한 의미는 ‘회복’입니다. 변질된 복음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교회와 성도로 돌아가자는 본질 회복운동입니다. 이 회복운동에는 세 가지 중요한 모토가 있는데 바로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오직 은혜로’(Sola Gratia)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라는 본질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인간은 성경의 권위를 추락시켰고, 마치 성경 위에 교회가 존재하는 것처럼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인간 자신의 노력이나 의지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선행과 공로가 구원의 조건이 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왜곡되고 뒤틀려 있는 복음을 바로 잡고자 했던 것이 바로 종교개혁이었습니다.
그리고 50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스스로에게도 진지하게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변질된 복음이 이제는 온전하게 회복이 되었는가? 교회는 오직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에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다시 또 묻고 물어서 순수한 복음의 회복을 위해 오늘도 우리는 개혁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눌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기독교의 가장 핵심이고 결코 변질될 수 없는 복음의 진수입니다. 그런 십자가를 두고 우리는 많은 질문을 가지게 됩니다. 그중 가장 많은 부분이 왜 꼭 십자가이어야만 했는가? 하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가 영원한 죽음을 앞에 둔 죄인들에게는 다시없는 기쁜 소식이지만, 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가장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우며, 너무도 비참한 모습으로 죽으셔야만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는 왜 세상 사람들이 보면 실패한 것 같고, 아무런 가치도 찾을 수 없는 십자가에서 구원을 이루셔야만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는 반드시 십자가의 피흘림이 필요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이 가장 먼저 드러난 곳은 ‘원시복음’이라고도 부르는 창세기 3:15절 말씀입니다. 인간을 꾀어 범죄케 하였던 뱀을 향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자의 후손 즉 그리스도께서는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나 너 사탄은 겨우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십자가에 하나님의 아들을 매다는 것으로 자신이 승리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실패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 십자가를 통해 사탄의 머리를 부숴버리는 최종적이고 완전한 승리를 이루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부족함이 없는 승리였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인류에게 궁극적인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첫째, 율법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구약의 그 모든 무거운 계명들로부터 인간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율법의 모든 요구를 다 만족시키셨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에서, 즉 율법의 저주와 형벌로부터 자유함을 얻은 것입니다. 두번째는, 죄로부터 자유케 하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 모든 죄의 값을 우리 대신에 치루신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십자가를 통해 화목을 이루셨습니다. 죄로 인해 단절된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와 서로 공존하며 사랑하고 섬겨야 할 모든 인간의 수평적인 관계들이 십자가를 통해 회복이 되고 화목케 되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인 히브리서 10장은 십자가에서 이루신 이 모든 일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고,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다”라고 말씀합니다. 제자훈련을 받으신 분들은 아마도 이 말씀이 “영 단번의 제사”를 말한다는 것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영단번의 제사는 영원한 단 한 번의 제사를 줄인 말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단 한 번의 사건이 인류에게 선사한 완전하고 영원한 효력을 설명하는 신학적 용어입니다. 보세요. 이 긴 설명이 ‘영단번의 제사’ 한 단어로 함축되어 설명되지 않습니까?
요즘은 기술 문명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서 모두 윈터치 또는 윈크릭으로 해결됩니다. 자동차를 타고서도 어두운데서 자동차키를 넣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Start 버튼만 누르면 다 해결됩니다. 밥을 지을 때도 예전처럼 장작을 때거나 혹은 석유곤로 심지에 불을 붙이기 위해 애를 쓰는 일 없이 버튼 하나로 끝납니다. 오늘 히브리서 기자도 십자가라는 일회적인 사건을 통해 수천 년 동안 인류가 짊어질 수밖에 없었던 죄의 무거운 짐을 완전하게 그리고 영원히 내려놓게 되었다 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오랫동안 유지하며 지켜왔던 신앙적 전통을 내려놓는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입술로는 그리스도인이라 하지만 여전히 모세의 율법에 따라 유대교의 제사전통을 고수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저자는 구약의 제사가 가지는 한계와 불완전성을 설명합니다.
첫째로 율법에 따르는 구약의 제사는 시간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구약의 제사는 마치 음식의 유효기간이 있는 것처럼 앞으로 나타날 완전한 제사 즉 그리스도를 제물로 하는 완전한 제사가 오기까지 주셨던 한시적인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구약의 제사는 온전한 것이 아니기에 되풀이해야 한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7:23절은 구약의 제사가 “날마다 드려야 하는 제사”(7:27)이고 10:3절도 ‘해마다’ 반복해야 하는 것이라고 제사의 특징을 설명합니다. 구약의 제사는 죄를 지은 사람이 짐승을 끌고 와서 그 짐승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여 자신의 죄를 그 짐승에게 덮어씌웁니다. 그리고 제사장이 그 짐승을 죽이고 그 피를 뿌려 그 사람의 죄가 심판받았다 즉 용서 받았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특히 대제사장은 1년에 한 번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자기 몸에 피를 뿌리며 하나님이 계시는 지성소로 들어갔습니다. 레위기 17:11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를 흘려야만 죄를 속할 수 있다”는 말씀에 따라 피를 뿌려 자신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용서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제사는 죄를 지을 때마다 반복되어야 했고, 그 때마다 제단에 피가 뿌려져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죄가 얼마나 가득합니까? 모르긴 몰라도 제단에서 흐르는 피가 강같이 흘러 내렸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완전한 속죄가 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 번째로, 구약의 제사는 동물제사이므로 인간의 죄를 결코 온전하게 대신 할 수 없다라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시는데 예배당 잘 보이는 자리에 앉으신 어떤 성도가 설교시간 내내 졸고 있더랍니다. 참다 참다 결국 손가락으로 그 사람을 가리키며 그 옆의 권사님에게 “거기 그 사람좀 깨워 봐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연세 많으신 권사님이 투덜거리며 “잠은 자기가 재워 놓고 누구보고 깨우래” 이랬다는 겁니다. 10:4절의 말씀처럼 매일 황소와 염소를 잡아 제사를 드려도 그것이 인간의 죄를 결코 대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저자는 5절에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다” 말씀합니다. 그리고 10절에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인간의 죄를 짊어지시기 위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인간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 즉 인간이어야 하고 또한 죄가 없어야 한다는 조건에 결코 흠이 없으신 대속제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분이 내가 져야할 죄의 대가를 십자가에서 모두 감당하셨습니다. 조금도 부족함 없는 완전한 제물로 스스로를 드리시고, 피를 뿌리셨습니다. 그것은 불완전한 짐승의 피도 아니고 예수님 자신의 피이고 몸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제사는 완전한 제사요, 한번 드림으로 끝나는 제사요, 다시 반복 할 필요가 없는 제사였던 것입니다. 자신의 몸을 한 번 드리심으로 온 세상의 모든 죄를 완전히 용서 받을 수 있는 제사였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불완전한 구약의 제사를 요구하셨는다고 생각하십니까? 모세의 율법에 따른 구약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그 시대에 당신의 백성들을 용납하시는 방편이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악된 인간과 화목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호의였던 것입니다. 물론 완전하진 않았지만 나쁘지도 않았습니다. 마치 비자를 갱신하듯이 일 년 마다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을 통해 속죄하면 되었고, 하나님께서도 그러한 인간의 노력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대속이 그런 것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더 좋은 것”임을 끊임없이 강조합니다. 히브리서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무려 8번이나 더 좋은 것이다. 더 크고 온전한 것이다. 더 좋은 소망이다. 더 좋은 언약이고 더 좋은 약속이라는 것을 주체할 수 없는 기쁨과 감동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같은 십자가 대속의 기쁨과 소망이 우리 안에도 가득하고 충만하냐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아직 십자가에 대해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은혜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교회는 다니기는 다니지만 십자가에 담긴 영적인 의미와 은혜를 모르고 그냥 무덤덤하게 교회를 다니십니다. 그런데 제일 안타까운 분들은 어떤 분들인지 아십니까? 주일학교 때부터 십자가에 대해 너무나 많이 듣고 또 들어서 아무런 느낌도 가지지 못하는 영적인 불감증을 가지고 있는 분들입니다.
설교의 황태자라 불리는 스펄전이 어느날 서재에서 흐느끼고 울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왜 울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스펄전은 십자가를 생각해도 더 이상 눈물이 나지 않는 스스로에 대해 괴로워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심성이고, 영적인 현실이라는 것에 마음이 무너져 내립니다. 목사가 괴로울 때도 그렇습니다. 성도들이 고난의 긴 터널의 지날 때보다 더 마음이 아플 때는, 현실의 문제 앞에서 그 마음이 굳어지고 메말라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지 못할 때입니다. 수십 년을 신앙생활 했지만 영적으로 둔감해지고 어두워져서 그 어떤 내면의 변화도 원하지 않을 때입니다. 나에게 있어서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요. 어떻게 해야 살아나는지도 압니다. 그러나 어떤 변화도 자극도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 적으로 부족한 것도 없고, 필요한 것도 없으니 여기에 초막 셋을 짓고 머물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렇습니다. 머리로는 알고 수없이 들었어도 그 십자가가 여러분의 가슴에서 눈물로 고백되지 않으면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어도 여전히 죄책감에 마음이 불안하고 십자가로 인한 속죄에 확신을 가지지 못하신다면 그것도 십자가를 모르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도 여전히 과거와 같은 삶을 살아가신다면 그분도 십자가의 놀라운 감격과 은혜를 모르시는 것입니다. 이 감격적인 사랑이 내 안에 역사하는데 어떻게 불안하게 죄악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러나 십자가의 사랑을 알게 되면 우리는 그 사랑 앞에 완전무장해제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최종적인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 십자가의 대속이 나를 위한 하나님의 감당할 수 없는 사랑임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태리의 어느 성당에 가면 큰 그림이 하나 걸려 있는데 그 그림은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흔히 보는 십자가의 벽화인데, 자세히 보면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그 예수님 뒤에 희미한 모습으로 더 큰 어떤 분이 계시는 것이 그려져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못에 찔린 손바닥에는 그 뒤에 계시는 그 분의 손바닥도 함께 포개져 있고 창에 찔린 예수님의 옆구리에는 예수님과 함께 그 분의 옆구리도 함께 찔려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이거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그 십자가는 하나님 자신의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죽으신 겁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나를 위해서 감당할 수 없는 대가가 지불된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자신을 희생하신 것입니다.
다시 10절부터 18절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10절입니다.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2절입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4절 말씀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8절 말씀을 통해 우리의 모든 죄를 이미 십자가에서 사하셨으므로 더 이상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필요가 전혀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단 한 번의 죽음으로 모든 인류를 위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영단번의 제사가 주는 하나님의 감당할 수 없는 은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을 열어 주시길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굳어지고 메마르고 강팍한 우리들의 심령이 십자가의 은혜로 회복되기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가 가슴으로 고백되어지길 기도하셔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도우시길 원하십니다. 그 완전하고 영원한 사랑에서 그 누구도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그 어떤 환난도 그 어떤 역경이나 박해나 기근이나 헐벗음이나, 그 어떤 위험이나 칼이라고 결코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실패자라 조롱하여 마치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더라도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결코 끊을 수 없으리라 아멘